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다테 마사무네 (문단 편집) == 취미 및 성격 == 어려서부터 외국, 서양 문물에 관심이 많았으며 이후엔 직접 서양으로 진출하기 위해 에스파냐인들의 도움으로 유럽의 갤리온을 본따 "산 후안 바우티스타"라는 함명을 가진 서양식 배를 만든 뒤 [[로마]] [[교황청]]으로 사절단을 보내 무역 허가서까지 얻어냈지만, 도쿠가와 막부가 쇄국령을 내린 탓에 이 무역 허가서는 휴지 조각이 되고 말았다. 덤으로, 이 때 유럽에 보낸 사절단을 이끌던 다테 마사무네의 가신 하세쿠라 츠네나가는 교황 바오로 5세 및 여러 귀족과 왕을 알현했을 뿐만 아니라, '''[[페테르 파울 루벤스|루벤스]]'''를 만나 멋진 초상도 남겼다. 자세한 것은 [[하세쿠라 츠네나가]] 항목 참조. [[파일:宮城スタジアム_20150630143347.jpg]] 트레이드 마크는 초승달 모양의 장식이 붙은 투구로 이곳저곳에서 곧잘 오마쥬 등으로 사용된다. 센다이 시에 위치한 [[미야기 스타디움]] 역시 이런 마사무네의 투구 장식을 본따서 지어졌다고 한다. 다만, 미야기 스타디움은 미적 측면만 지나치게 우선한 나머지 일본에서도 스포츠를 관전하기 어려운 구장이 되어 버렸다.[* 이 때문에 J리그 팀인 베갈타 센다이는 시내 [[나나키타 공원]]에 위치한 축구전용 구장인 유어텍 스타디움에서 경기를 하고 있다.] 이런 투구 말고도 멋을 잘 부렸는지, 당시엔 멋쟁이 남자를 두고 '다테男'이라 부르는 게 유행했다고 한다. 하지만 다테가 진짜 멋져서 그리 부른 것이 아니라 막부 등으로 행차할 때마다 길목에 있는 일반 백성들에게 돈을 뿌려대며 환심을 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로 인해 겉치레나 허세를 뜻하는 伊達(다테)의 어원이 됐다는 설도 있다. 마사무네는 평생 상대를 기겁하게 하는 허풍과 과격한 언동 및 때로는 지나칠 정도의 계략 및 뒷공작으로 악명이 높았다. 그 외에도 당시 남자들로서는 상당히 깨는 취미였던 '''[[요리]]'''에 조예가 깊은 것으로 이름이 높았다. 병사들이 먹을 전투식량을 개발하다가 취미로 변했다는 모양. "요리란 모름지기 제철 재료를 자연스레 꺼내서 주인이 직접 조리하여 대접하는 것이다." 하는 명언을 남겼고, 센다이 근처의 몇몇 요리학교는 '''다테 가의 비전 요리법'''에 기원을 두고 있다고 할 정도. 정월의 오세치 요리에서 빠지지 않는 '다테마키'[* 계란에 생선살이나 새우 같은 해산물을 으깨어 술과 함께 섞고 달게 간하여 두툼하게 부친 뒤, 그것을 김밥처럼 돌돌 만 음식.] 역시 다테 마사무네란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란 설이 있는데, 이는 유독 다테 마사무네가 '다테마키'를 좋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렇게 요리에는 조예가 깊었지만 술에는 약했고 음주 습관은 매우 나빴던 모양으로, 숙취 때문에 '''[[쇼군]]'''과 한 약속을 어겼던 적도 있다고 한다. 보통 사람 같으면 끔살이다. 애연가로, 그의 시종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담배]]를 시간표를 정해 놓고 정해진 시간에 하루 4번 피웠다고 한다. 그가 사용한 담뱃대가 보존되었다. 프라이드가 쓸데없을 정도로 높았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기준으로 수억 엔에 달하는 다기를 감상하다가 떨어뜨릴 뻔해서 허겁지겁 잡았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 이까짓 다기 때문에 놀랐다는 사실이 괘씸해져 다기를 그대로 박살냈다는 일화[* 이 일화는 다테 마사무네의 일화가 아니라 중국 불교 선종의 경전에 나오는 일화이다. 해당 일화에서는 자기를 박살낸 사람이 중국의 장군으로 나오며 이 책은 당연히 다테 마사무네의 생존 시기보다 더 오래 전에 출간됐기 때문에 이 일화는 선종 계열의 불교가 일본 사무라이 계층에 널리 퍼지면서 마사무네의 일화로 오해된 경우인 듯하다. 이와 같이 일본 센고쿠 시대의 수많은 일화들이 알고보면 다른 원전이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는 난세라는 센고쿠 시대의 특징으로 공신력 있는 역사서의 편찬이 이뤄졌던 시기도 아니고 대부분의 일화들이 각 가문들의 자화자찬용 기록에서 나온 것들을 조합한 것이다 보니 신뢰성이 떨어지는 일화들이 많다.]나 전장에서 좀 오버 액션으로 총알을 피했는데 그 사실에 자존심이 상해서 총알 날아다니는데도 불구하고 꼿꼿이 서 있었다는 일화도 존재한다.[* [[우에스기 켄신]]에게도 비슷한 일화가 있는데, 호조 가문을 정벌할 당시 화살이 닿는 성문 앞에 가서 털썩 앉아 차를 따라 마셨다고 한다.] 너무 거만해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작당하여 [[도이 토시카츠]]와 [[우에스기 카게카츠]] 등 특히나 마사무네를 싫어하는 무장 4명을 마사무네와 함께 초대하여 같은 자리에서 저녁밥을 먹게 했다. 하지만 큰 싸움이 벌어질 거란 예상과 달리, 그날 밤은 의외로 조용히 넘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도쿠가와와 도요토미가 사실을 알아 보니 자신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한 자리란 걸 눈치 챈 마사무네가 요리사를 시켜 그들의 국을 전부 매우 뜨겁게 끓여놨고 그걸 마신 4명은 혀를 데어 말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것이라고 한다.[* 일본식 식사에서는 우리나라처럼 국을 수저로 떠 먹는 게 아니라 좀 작은 국그릇을 들고 쭉 마시는 식으로 먹기 때문에 국을 저리 뜨겁게 데우면 당연히 혀를 덴다.] 겉보기와 달리 자신의 군사들은 유달리 아꼈다고 한다. 동맹을 제안하러 사신으로 보낸 병사가 타국에서 기습받아 불구가 되어 돌아오자 그 적국을 초토화시켰고 병사 몇 명이 포로로 되었을 때도 그 상대국을 쳤다고 한다. 또 [[카타쿠라 카게츠나]]를 비롯해서 심복들이 죽어나가자 '내 생명을 가져가는 것 같다.'며 한탄했다고 메이겐슈에 기록되어 있다. 도쿠가와 가문과 밀접한 관계를 구축하고 막부의 원로가 되고 나서도 묘한 포지션을 유지했으며, 얕볼 수 없는 노련한 책략가로 경계받았다. 스페인 국왕에게 보고된 여러 군인과 예수회 성직자들의 편지에는 대개 마사무네가 이에야스의 목숨을 노리고 있다던가, 언젠가 천하를 쥘 사람이라는 얘기가 빠지지 않는다. 일화에 따르면,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오른쪽 눈은 어쨌느냐?"라고 묻자, "나무에서 떨어져서 오른눈이 튀어나왔는데, 너무 맛있어 보이기에 그만 먹어 버렸다."라 대답했다고 한다. 2대 쇼군 히데타다를 센다이 저택으로 초대해 요리를 대접했는데, 계략가였던 마사무네가 쇼군을 암살하는 게 아닐까 걱정한 중신이 "마사무네 님이 먼저 (독이 들었는지) 맛을 보시오"라고 하자, 버럭 화를 내며 "(막부의 기반이 약했던) 10년 전이라도 정정당당하게 반란을 일으켜서 싸웠으면 모를까, 비겁하게 독살하진 않았을 거다." '''내가 반란을 일으켰으면 일으켰지 독살을 왜 하냐'''는 이 엽기적인 대답에 히데타다는 껄껄 웃으면서 마사무네를 칭찬했다고 한다. 그리고 히데타다의 사자들이 센다이로 와서 "이번 정월엔 쇼군께서 이러이러한 선물을 받고 싶어하신다."라고 넌지시 귀뜸을 하자 "천하의 쇼군께서 어린아이처럼 구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윗사람에게 올리는 진상품은 아랫사람이 고르는 법인데 이 마사무네의 안목을 믿지 못하는 거요?"라고 반박했다고 한다. 이 외에도 3대 쇼군 이에미츠가 매사냥을 너무 좋아해 사냥하다 해가 지면 아무 데서나 노숙하기도 해서 호위에 문제가 생기자, 슬그머니 이에미츠에게 "매사냥은 위험합니다. 저도 (매사냥을 좋아하던) 이에야스 공의 목숨을 노린 적이 있습니다."라고 해서 등골이 서늘해진 이에미츠는 다시는 매사냥을 하지 않았단 일화가 있다. 이 경우 단순히 이에미츠가 마사무네를 히데타다의 유언으로 아버지처럼 모셨기 때문에 따랐을 개연성도 있지만, '''마사무네는 그러고도 남을 사람''' 취급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말년에는 쇼군 앞에서 칼을 차는 것을 예외적으로 허용받았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과 영향력을 손에 넣었다. 특히 이에야스보다 후대의 인물인 만큼 그의 사후에 쇼군이 바뀌는 것을 직접 보아왔고 측근으로서 역대 장군들을 쭉 섬겼기 때문에 에도 막부 초기의 중요 인물로 알려져 있다. 어찌 보면 장수로서보다는 행정가나 정치가로서 더 유능하고, 유명해진 인물이다. 안정적인 기반을 구축했기 때문인지 아니면 '''워낙 많이 썼기 때문인지,''' 평소 가신들에게 보낸 편지와 서찰이 수천 통이 넘게 남아있어서 그의 성격을 대변해 주거나 당시의 정치적 상황에 대해 알려주는 중요한 연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데 편지에서도 여러 모로 우스운 내용들이 발견된다는 게 문제. 특히 여러 부끄러운 이유로 '읽거든 태워버려라'라는 구절이 적혀 있는 서찰들이 현대까지 고이 보관되어 있는 점이 [[정조 어찰첩]]을 연상케 한다. 물론 마사무네의 가신들은 보험 삼아서 서찰을 보관해두진 않았겠지만. >글씨가 더러워서 미안하다. 새벽에 종자들과 함께 '''[[팔씨름]]'''을 하느라 팔이 후들거려 글씨를 제대로 쓸 수가 없다. 나이 값도 못하고 부끄러우니 '''읽거든 태워버려라(卽火中).''' >한밤중에 쓰느라 정신이 없어서 내용이 다소 산만하다. '''읽거든 태워버려라.'''(추신이 '''2개''' 써 있는 편지) 또 그의 편지 덕에 현대인들이 알게 된 에피소드 중 하나로, 부하인 카타쿠라 카게츠나에게 아들이 태어나자 카게츠나가 주군인 마사무네에게 아들이 아직 없는데 자신이 먼저 아들을 얻은 것을 미안하게 생각한 나머지 '''아들을 죽이려고''' 해서, 이것을 듣고 경악한 마사무네가 카게츠나를 급히 뜯어말렸다는 일화가 있다.[* 단, 편지 내용에 '하도 아들을 죽이겠다 말하고 다닌다고 들어서 급하게 편지를 쓰는 바이다.'라는 구절이 있어서, 바로 죽이지 않고 죽이겠다고 주변에 공언하고 다닌 것으로 미루어 보아 주군의 인기 상승을 위한 일종의 퍼포먼스였을 가능성도 있다.] 이외에도 달을 감상하는 시회를 열었는데 하필이면 그 날 구름이 껴서 달을 못 보게 되는 바람에 모임이 침울한 분위기로 끝났고 그 때 달이 나오지 않는 아쉬움을 소재로 쓴 시의 시어를 일부 수정해서 모임의 한 참석자에게 나중에 보낸 편지도 남아 있어서 문화인으로서의 면모를 짐작케 한다. 2017년 1월 11일 미야기 현 오오사키 시에 기증된 마사무네의 다른 편지가 토호쿠 지역 일간지 카호쿠신보에 공개되었다. 마사무네가 1610년 시나노 마츠모토 번주 이시카와 야스나가에게 보낸 것으로, 이시카와의 초대에 응할 수 없게 되었다는 사과 편지이다. 그런데 초대에 응하지 못한 이유가 '''아침부터 밤까지 내내 술을 들이붓듯 마시다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뻗어버려서'''였다고. ([[http://www.kahoku.co.jp/tohokunews/201701/20170112_13009.html|기사]])[* 기사 본문에 이 편지의 실물 사진이 첨부되어 있는데, 술 취해서 쓴 것마냥 --[[괴발개발]]-- 휘갈겨 쓴 필체로 쓰여 있다.] 우스꽝스러운 사건을 터뜨리는 사고뭉치의 이미지는 그가 죽을 때까지 늘 따라다녔는데, 나이가 든 후에도 갑자기 에도 성 안에서 막부의 중신이자 로주(老中) 신분인 사카이 타다츠구를 질질 끌고 가서 [[스모]]를 하겠다며 시비를 걸어 엎어치고 메친 끝에 '''지거나,''' 보고 싶었던 [[노(일본)|노]] 공연이 끝나버렸다는 이유로 갑자기 노 배우들에게 "배우와 '''관객'''들을 모두 불러모아서 처음부터 다시 공연해라. 그렇지 않으면 '''전원 죽여버리겠다'''"라면서 땡깡을 부리는 등 ~~배우는 그렇다고 쳐도 관객은 뭔 죄~~ 황당하기 그지없는 에피소드들이 다른 다이묘들의 기록에 남아 있다. 본래부터 별난 행동, 돌출행동을 좋아하고 화려하고 우스꽝스러운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던 것도 있지만, 에도 막부의 초기는 조금이라도 거슬리거나 시비를 걸 구실이 생기면 다이묘를 [[가이에키]][* 영지를 몰수하고 서민으로 강등시키는 처분. 즉 죽지만 않을 뿐 '''가문이 멸망'''하는 것이다.] 처분하는 철권통치였기 때문에 과거의 위험인물 1순위인 마사무네가 [[흥선대원군|일부러 막부측의 경계심을 풀기 위해 웃기는 사건을 벌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물론 이런 식의 행동이 정말 끔찍한 사건으로 번진 케이스도 없지 않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아군인 진보 데와노카미 시게스케의 부대가 패주하는 것을 보고 전부 쓸어버리라고 명령해서 아군과 적을 가리지 않고 벌집으로 만들었을 정도. 살아남은 진보 가문의 가신들이 막부에 항의하자 '도주하는 아군을 방치하면 아군 전열까지 무너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지 않으냐?(=죽은 놈들이 먼저 겁쟁이처럼 행동한 게 잘못 아니냐?)'라고 역으로 따지고 들어서 무마했다고.[* 그런데 진보는 영지가 다이묘의 기준인 1만 석에도 미치지 못하는 작은 세력만을 가진 무사였기 때문에 적의 본대에게 밀리는 것은 이상할 게 없었고, 그런 진보 부대를 밀린다며 쏴버린 것은 당시 기준으로도 잔인무도한 행동이다. 진보에 비하면 다테의 영지 규모가 깡패여서 이런 일을 저질러놓고도 어영부영 넘어간 것.] 서양에도 그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다. 교역을 위해 일본에 온 에스파냐 탐험가 세바스티아노 비스카이노(1548~1624)가 그와의 만남에 대한 기록을 남겼는데, 통상을 위해 [[도쿠가와 히데타다]]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알현한 직후 에도성 거리에서 마사무네 일행을 만났다고 기록하고 있다.[* 참고로 이 통상 협상 자체는 꽤 진전이 이루어졌음에도 결국 [[가톨릭]] 포교 문제로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역시 탐험가 일행을 알아본 마사무네가 사람을 보내 '자신을 위해 축포를 쏴 달라'라는 부탁을 하자 세바스티아노는 이에 부하들을 시켜 축포를 쐈다.[* 이들은 외국인이었고 살상 용도는 아니였지만 이런 행동은 목숨 거는 행위나 다름 없었다! [[추신구라]] 참고.] 총소리에 놀란 말들 때문에 실었던 짐들이 떨어지고 타고있던 사람도 떨어져서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현장을 본 마사무네는 미친듯이 소리내서 웃었다고. ~~보는 사람은 개꿀잼 당한 사람은 골탕~~ 어쨌든 본인은 이 상황에 흡족했는 듯 자신이 직접 말에서 내려 고맙다는 인사를 하며[* 이에 "예의가 바른 사람이다"라고 평을 남겼다.] 에도 성내 자신의 집으로도 초빙한 이후 마사무네가 유럽식 갤리온을 건조하는 데에 세바스티아노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렇게 성격이 대단히 재미있었는데 이후 그 후손인 [[다테 지카무네]] 대에 이르러서는 당사자는 슬프지만 주변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재미있는 일이 벌어진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